접힌 자국을 내며 이어지는 벽

1
벽을 그리는 것─평면에 선을 긋는 것─에서부터 건축가의 프로젝트는 시작된다. 건축물을 설계하는 데 있어 벽이 태어나고 변모해 가는 아주 일반적인 과정을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1. 주어진 대지의 경계를 종이에 이점쇄선으로 그린다. 외벽이 될 실선을 그리며 건물의 대략적인 형태를 만들고 땅의 적당한 곳에 위치시킨다. 덩어리를 상상하며 윤곽선을 그린다. 벽은 공간을 구획함으로써 제한적인 속성을 띠지만 동시에 가능성을 말하기도 한다.

  2. 어느 정도 덩어리의 형체를 갖추었다면 건물의 내벽선을 그어 공간을 나눈다. 방이 만들어지고 프로그램이 개입하며 벽은 공간의 위계를 만들거나 없앤다.

  3. 그렸던 벽의 선을 끊고 지워가며 문을 내고 창을 만든다. 사람의 움직임과 시선을 떠올리며 공간과 공간 사이의 관계, 공간을 둘러싸는 환경과의 관계를 엮는다.

  4. 위에서 내려다보는 평면의 시점에서 벗어나 입체적으로 공간을 유영하며 바라본다. 선이었던 벽이 두께를 가지고 수직으로 세워지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벽이 접하고 있는 바닥과 천장, 혹은 다른 벽과의 관계, 그리고 공기, 빛, 바람과 만나 반응하는 공간의 분위기다. 공간이 담아낼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이다.

건축가는 구축의 과정에서 벽을 순차적으로 이해하는 편이다. 땅이든 기초든 평평하게 바탕을 다지고, 혹은 그 존재를 가정하고 그 위에 벽을 세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김보경의 벽은 구축의 관점에서 단계적으로 등장하는 건축의 요소이기보다 벽 자체가 시발점이 되어 조각나 있던 시공간을 엮으며 조직해 나가는 주체로 볼 수 있다. 종이 위에 그리는 선이 아닌 공기 안에 엮어가는 실과 같다. 바탕을 상정하기에 앞서 작가는 이야기와 관계를 담은 벽을 만들어 우리를 초대한다. 그 벽을 통해 내가 딛고 서 있는 지금과 과거 사이에 문을 내고 창문을 뚫어 방을 건너도록 유도한다. 어느새 시공간을 초월한 벽들의 경계를 헤매다 결국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스며들어 있는 땅으로 복귀하여 심연의 기억을 되돌아보게 한다. 지면을 가정하고 세운 벽이 아니지만 김보경의 벽은 토지에 뿌리를 둔 건축물과 식물을 작업 안으로 끌어와 필연적으로 지면과 끈끈하게 관계 맺는다.

벽은 양면적이다. 벽은 흔히 한계이자 단절을 비유적으로 나타내지만, 오히려 벽이 존재하기에 연결과 관계가 시작된다. 외부와 내부를 나누면서도 내외부에 모두 접하기에 관계를 이야기할 수 있다. 폐쇄와 개방, 차단과 유도, 고립과 공존, 경계이자 연결고리, 공간에서 가장 오래 시선이 머무는 곳이자 시선을 제한하는 곳, 이 모든 것이 벽의 속성이다. 벽이 없이 사방으로 열린 무한한 공간에서 연결과 개방을 말하지 않는다. 빛과 공기에 반응하는 벽이 존재함으로써 경험자의 시선을 유도하고 제어하며, 벽 너머를 상상하게 만드는 것에서 관계가 시작된다.

2 땅에서 솟아나는 벽, 지면에 접힌 자국을 내다

김보경의 벽은 살아 움직인다. 지면 위에 세워진 견고한 구조체라기보다 지각변동으로 솟아나고 접힌 지면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벽은 지면의 연속이고, 우리는 몸을 움직여 그 연속된 면을 따라 걸어간다. 고개를 넘듯이 그 너머를 상상하며 새로운 풍경을 계속해서 맞이한다. 영역을 분리하는 벽의 역할은 점점 흐릿해진다. 작가의 벽은 종이처럼 접히기도, 책으로 변형되기도 하며, 한없이 작아지고 한없이 부풀어 커지기를 반복한다. 건축에서나 공예에서 접고 엮는 행위는 주로 모서리를 만드는 것이며, 보통은 구조체가 더욱 단단해지는 과정이다. 작가는 두 손으로 접고 엮는 행위를 반복하지만 실이나 종이와 같은 유연한 매체를 활용하기에 모서리는 흐트러지고 부드러운 구조체는 움직이며 확장한다. 경계를 짓기보다는 언제든지 더 엮어 나갈 가능성을 열어둔다. 선과 선이 만나 교차점을 만들며 뻗어 나가고, 매듭으로 공기를 품어 이야기는 시공간을 가른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벽과 일체가 된 작업에서 새로운 층을 중첩하는 시도를 한다. 벽면에 종이를 밀착시키지만 어쩐지 공기를 불어 넣듯 부풀어 오른다. 자연광의 유입을 최소화하여 빛을 세심하게 제어한 전시장 안으로 들어오면 마치 동굴 속에서 횃불 하나에 의존해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나아가며 시선을 옮겨 다니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월페이퍼 속 이미지 조각들 사이의 경계를 헤매는 동안 작가는 우리에게 경로를 기억할 수 있도록 지팡이를 건넨다. 작가에 의해 재구성된 아카이브 안에서 무엇을 연상하고 연결 지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객에게 맡긴다. <마력 매듭 ─ 사이로 번득였다가> (2024)와 <마력 매듭 ─ 번뜩였는가> (2024)는 월페이퍼 작업 위에 또 하나의 레이어를 만들며 익숙하지만 낯선 그림자를 더한다. 리소프린팅 종이 조각들의 선명하게 잘린 자국은 다시 봉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일까? 작가의 작업은 가장자리를 가정하기보다 그 너머를 상상하게 만듦으로써 어딘가로 끊임없이 흘러갈 것을 암시한다.

전시장 가운데에 매듭을 닮은 형태의 평면을 가진 두 개의 벤치가 놓여있다. 벽과 벽이 만나는 모퉁이를 마주하도록 배치된 벤치에 앉아 일정한 거리에서 시간을 두고 김보경의 벽을 바라본다. 벽 가까이 다가서서 관찰하는 것과는 다른 눈높이로 응시한다. 콜라주 안에 담긴 시간과 공간에서 충분히 표류하다 벽과 벽이 만나 방향을 틀어 이어지는 지점을 따라가 본다. 월페이퍼 작업의 모서리에 가 닿았지만, 여전히 벽은 완결되지 않는다. 방향을 달리하며 자기 증식하는 벽에 또다시 문을 내고 창을 만들며 그 너머로 이어지는 김보경의 다음 여정을 따라갈 준비를 마친다.

1

팀 잉골드,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 차은정, 권혜윤, 김성인 (옮긴이), 이비, 2024, 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