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글게 엮이며 구축되는 세계

개인전 ⟪하이픈⟫(2022)의 기획글로 쓰여진 글을 재편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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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뜨개를 배웠을 때다. 지금 생각하면 가장 단순한 겉뜨기였지만 잠깐 집중이 흐트러지면 앞에서 뒤로 들어가야 하는 진행의 방향과 횟수를 실수해 패턴이 바로 망가졌다. 뜨개질을 하면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비우기 좋다는 조언이 무색하게 한순간도 실수하지 않으려 하니 꽤 피곤했다. 눈과 머리에만 힘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꼼꼼하게 해보겠다고 단단하게 실을 당기며 한 땀 한 땀 앞으로 나아갔더니 어느 순간 점점 구멍이 작아지면서 바늘이 들어가기조차 힘겨웠다. 손가락 끝 얼얼하게 밀어 넣었지만 계속 진행할 수 없었다. 출입구가 점점 좁아지는 길로 이미 들어섰기 때문이다. 고수들이 많이 하는 말, ‘힘 조절’을 몰랐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고 다시 하면서 ‘힘을 빼야지’만 계속 되뇌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느슨해진 코로 인해 아래로 갈수록 길어지더니 우스꽝스러운 사다리꼴이 되었다. 힘을 빼야 하는 순간과 적당히 전진해야 하는 정도를 익혀야 했다. 도안이나 뜨개 종류별 방법 같은 매뉴얼이라면 모를까, 얇은 실의 무게를 그에 비해 커다란 손으로 가늠하며 매번 일정한 힘으로 당기는 방법을 책이나 영상을 통해 배우기는 어려웠다. 몸에 기반한 노동과 기술의 수련이 대체로 그럴 테지만 신체로 익히며 기억하고 시행착오를 쌓아야 알 수 있다. 익숙해진 이들은 함께 모여 수다를 떨면서, TV를 시청하면서, 또 긴장을 놓고 멍때리듯 한다는데 그런 감각을 알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다. 흡사 아기가 발끝과 척추 전체에 온 힘을 주며 뻗는 동작을 반복하다가 일어나고 한 걸음을 떼기까지 십 수개월이 걸리지만, 장애를 갖지 않은 성인이라면 걷는 방법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무의식적으로 할 수 있게 되어있는 상태와 유사하달까. 그렇게 천천히 몸으로 익힌 ‘거리두기’는 코와 코 사이의 안전거리를 만들어 조금씩 어긋나기도 하는 열을 맞출 수 있게 했고, 성긴 간격으로 완성된 머플러는 빡빡하게 짜여진 것보다 유연하고 부드러우며 감당해야 할 무게도 덜어 주었다. 또한 털실 사이 사이의 공간은 외부의 찬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구멍이 아니라, 그 자리에 단단히 자리 잡고 움직이지 않는 공기층이 생겨 보온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몸의 체온으로 보이지 않는 공기의 온도를 높이고 따뜻한 공기는 보호막이 되어 다시 몸을 보호하는 원리, 그것은 하나의 ‘코’로만은 존재할 수 없고 여러 개의 코가 연결되어 세계를 함께 구축하는 뜨개의 근본적인 속성과도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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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의 작업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렇게 뜨개에 대한 경험을 복기한 이유는 작가가 실이라는 재료와 직조 방식을 자주 다루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작가가 살아가는 도시와 주변 환경을 마주하며 주조하는 방식이 뜨개와 닮았다고 느낀다. 작가는 콜렉티브 ‘25시 세일링’으로 활동하던 시기부터 도시 안에 혼재되어 있는 시대와 시간의 흔적을 추적하고, 특히 어그러진 채로 삶에 스며든 근대의 양상을 포착해 다양한 시각적 매체로 작업해 왔다. 조각난 을지로 풍경은 다각도의 층으로 엮어져 설치작품이 되어 관객이 서는 방향과 눈높이에 따라 다른 경험을 주었다. 씨실 날실을 엮듯이 콜라주 된 평면 그래픽은 디지털에 의존하면 무한 팽창이 가능할 테지만, 층층이 색을 겹치는 ‘리소’라는 인쇄방식을 거치고 망점과 망점 사이를 거칠게 만들며 상상의 여지를 만들었다. 또 화이트 큐브라는 진공 안으로 작품을 박제시키지 않고 투과하는 빛을 한껏 끌어안는 작품은 날씨와 시간대에 따라 변모하고 굴절하는 장면을 만들기도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면면은 역사의 긴 시간 동안 여러 사건을 겪으며 구축되었다 부서지고 또 그 잔해의 축적으로 현재가 되었다. 물리적으로 사라져도 완전히 지워졌다기보다는 바닷속에 존재한다는 미세 플라스틱처럼, 공기 중을 부유하며 떠도는 식물의 씨앗처럼, 보이지 않지만 강력하게 인간의 몸에 침투하는 바이러스처럼 어딘가에 홀연히 전달되어 혼종, 자생, 변이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다시 존재가 된다. 그런 역사의 파편이 들러붙은 전체가 여기이며 또 나다. 하지만 오랜 역사의 그저 짧은 순간에 서 있는 우리는 기실 어떤 것이 A의 결과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B의 역사인지 직감으로만은 알지 못하며, 때로는 그런 구분과 구획이 중요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김보경이 포착하는 것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여기다. A와 B가 함께 있는 풍경 전체, A와 B를 연결하고 관통하는 선형적 시간 혹은 A라는 ‘코’와 B라는 ‘코’ 사이의 보이지 않지만 든든한 공기층 같은 틈에 다가간다. 과거의 물성인 근대 건축물 돌 틈새에 오늘의 시간으로 피어나는 이끼라던가, 밤에 켜지는 화려한 각종 도시의 불빛이 근대의 건물 벽면에 만드는 얼룩이나 반사 같은 것, 의미가 휘발되거나 형태는 사라져도 결국 남아있는 과거와 만난 오늘을 사는 존재의 이야기다. 해독하기 어렵지만 몸에 체화된 기억이다.

이 ‘틈’은 종적으로 A와 B라는 거대 역사의 시간도 연결하지만 횡적으로는 바깥과 신체도 연결한다. 김보경이 보여주는 근대의 유산 혹은 부스러기들은 시대를 증명하는 기록이라기보다는 잠재적으로 몸이 기억하고 반응하는 것들을 따라가며 실존의 역사와 만난 것이다. 그런 만남은 예상치 못한 굴절면이 되어 순간적인 섬광이나 물결 위의 일렁임 혹은 더 확산되는 파장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특별한 서사가 아니더라도 한땀 한땀 종횡으로 직조되는 이야기는 다른 차원의 패턴을 만든다. 마치 뜨개 고수들이 단순한 니팅방법을 조합해 입체적인 도안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김보경은 다분히 역사가 만들고 또 망쳐온 것들에 반응하며 실증적 관찰을 하지만 어느새 길을 틀어 우리를 엉뚱하지만 새로운 곳으로 데려간다. 분명 구체적 ‘리서치’를 기반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두둥실 떠도는 시선을 따라 모호한 곳에 머문다. 김보경의 작업을 계속 떠올리며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 감각이 예술적 리서치겠다는 생각에 도달할 즈음, 얼마 전 한국어로 출간된 를 읽었다. 제대로 첫 장을 펴기도 전 표지에 적혀있는 몇 가지 ‘리서치’에 대한 정의를 보고 조금 놀랐다.

‘빈둥거리며 영혼을 초대하는 것’,
‘당신을 새로운 어딘가로 데려가는 무언가의 암시’,
‘인간의 핵심에 가까운 것’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재구성하는 것’

이 책의 표지는 ‘리서치’에 대해 정의하는 몇 개의 시적인 문장들과 일루전 같은 이미지로 되어 있었는데, 저자가 본문에서 언급하는 리서치에 대한 생각 중 몇 개의 상징적 정의가 표지와 커버에 적혀있는 그것은 김보경의 작업를 바라보며 느낀 감정과 구체적으로 닮아있다. 리서치는 본인만의 관점으로 무언가를 집요하고 바라보며 쫓는 과정에서 만나는 것을 엮는 행위다. 그것이 예술과 예술적 리서치여서가 아니라, 명확한 과학적 수치를 기반하는 것이더라도 그 시작은 미지의 질문에서 출발한다. 목적지를 알고 배에 올라탔어도 가는 길목에 어떤 풍랑을 만날지 알 수 없고, 주변이 모두 파란 바다에서 현재의 위치를 명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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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베를린에서 지내며 바라본 풍경 중 소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눈에 띈다. 작가는 새로운 곳에서 삶을 시작하면서 첫 겉뜨기를 배울 때처럼, 직립을 위해 처음 발걸음을 뗄 때처럼, 한동안 뭉툭해졌던 호기심의 눈을 뜬 채로 누군가가 사는 집과 주변을 응시한다. 조금 떨어져서 기록한 이웃의 집들은 대체로 안이 보이지 않고 문은 닫혀있다. 다만 안에서 창을 통해 볼 바깥 풍경이 창에 비친다. 지극히 사적 공간인 ‘안’의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의 안’과 ‘나의 밖’이 함께 공유하는 장면이다. 닫혀 있지만 차단된 것은 아니고 물러나 있지만 연결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 그렇게 조심스럽게 세계를 연결한다. 아직 어색한 관계의 균형은 이런 속도일 것이다. 틈을 만들거나 그 틈을 매개로 엮는 연습이 익숙한 작가에게 작품이 놓이는 위치나 관객과 만나는 거리도 그와 궤를 같이한다. 바깥의 날씨를 느끼며 전시장에 입장했을 이가 전혀 다른 비일상으로 입장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투과되며 중첩되는 작품을 만나거나(〈스크롤링 반사광 — 별이 총총한〉 2022, 윈도우 필름 설치, 투명 시트지 프린트), 적극적으로 참여를 유도하는 건 아닌데 관객은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기며 살펴보게 된다. (〈메쉬 스티치 크로쉐 연습: 낮은 물, 빛나는 것, 거울 반사 #01-03, #04-06, #07-09〉 2021, 아코디언식 접이 이미지 리서치 책, 리소 프린트 / 〈니팅 양면 드로잉 — 슬립 스티치〉 2022, 종이 위에 양면 리소 프린트, 퀼트실) 조용한 호수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가 잔잔한 물결을 만들고 시각적 환영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김보경의 전시장에 발을 들여놓는 우리는 조심스럽게 연루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외부의 찬 공기가 밀려 들어와 내부의 공기를 움직이게 할 때, 전시장에 매달려 있는 작품은 흔들릴 것이다. 뜨개에서 씨실과 날실은 양손의 균형이 맞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만들어 지는 내내 균형잡기를 연습한 작품들은 오뚜기처럼 양쪽으로 같은 힘을 분산하며 흔들리다가 곧 균형을 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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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의 첫 개인전 제목 하이픈(Hyphen, -)의 용법을 떠올려 보자. 이 짧은 선은 동등한 무게로 단어와 단어를 연결한다. 마땅한 말이 존재하지 않아 새로운 언어가 필요할 때 이 연결고리로 의미를 엮은 합성어를 만든다. 그렇게 사용하다 자주 쓰이고 익숙해져서 기호가 사라져도 두 단어가 떨어지지 않게 되면, 하이픈을 생략한 채 독립된 단어로 정착한다. 이름 없는 대상을 호명하기 위해 비가시적 존재들을 물결 위로 끌어 올리는 연결의 다리가 되었다가 소명을 다하면 사라진다. 코 사이의 공기층 같은 단단하면서 동시에 헐거운 존재다.

전시에는 식민지를 거치며 세워진 서구식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아칸서스 문양 이야기가 등장한다. 독일로 삶의 거처를 옮겼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여정에서 국경을 넘어 반복해 만나게 된 이 양식을 작가는 다시 바라본다. 경계를 넘나들고 거리를 둘 때 인식하게 되고 다시 보이는 것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힘 있는 덩굴 식물은 그리스-로마의 건축에서부터 고전 미술 장식의 중요한 모티브 자주 등장하고, 오늘날에도 서구식 고전풍으로 무언가를 만들 때마다 관성적으로 새겨 넣어지는 이미지다. 우리 안에 잠입한 서구 문화는 혼재하고 변이되어 숙주처럼 존재하면서 불쑥불쑥 정체를 드러낸다. 이 문양의 여정을 쫓던 작가는 팬데믹을 겪고 대면과 비대면의 간극이 흐려진 시기를 거치며, 온/오프와 실재/비실재 사이를 떠도는 이미지를 수집하여 연결하고 확장했다. 아칸서스는 죽음이 드리워진 곳에서 땅속의 한 조각 뿌리가 살아남아 홀로 자라난 이야기 등 강인한 생명력에 대한 에피소드가 다양하게 전해진다. 영생을 바라던 시대에 영원을 기원하는 마음과 동시에 조형적으로도 아름다운 이 식물은 부적 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고단한 현실에서 이상을 기원하는 상징으로 여겨지며 문양으로 더 익숙한 이 존재는 실재의 식물이라기보다는 상상의 존재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그래서 문득 ‘실재 생물로서의’ 식물이 궁금해져 정보를 찾아보았다. 원산지가 열대의 지중해와 북서 아프리카인 뜨거운 지역인데 한국에서 노지 월동도 가능하다니, 위기와 재난에서 유유히 살아남은 신화 같은 이야기가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김보경의 작업을 천천히 톺아보는 과정은 인지하지 못하지만 알고 있는 것, 감각하지만 잡을 수 없는 것, 보이지 않지만 단단한 것, 이런 것들에 한 뼘 다가가는 ‘하이픈’이 되는 시간이었다. 여기 당신이 들어설 수 있는 성긴 틈이 있다. 작가의 ‘코’와 ‘코’ 사이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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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밀러 (지은이),박유선,박지윤 (옮긴이), 플레인앤버티컬, 2022-08-12, 원제 : What Is Research?